“오늘 요 앞 병원에서 무릎 주사 한 대 맞았더니 여까지 오는 데 네 번밖에 쉬지 않았어. 다음 주에 주사 한 대 더 맞고 방 구하러 가봐야지.”
이모(81) 할머니는 병원에서 익선동 한옥 쪽방까지 700m 남짓한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평소보다 절반을 덜 쉬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여섯 번 이상을 선 채 쉬어야한다. 의자에 앉아 쉬면 좋겠지만 아픈 무릎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익선동 할머니들의 인터뷰 영상 / 촬영=배동주 편집=정은비
여섯 번이고 열 번이고 선 채 쉬어가며 방을 구하러 갈 수 있는 이 할머니는 그나마 다행이다. 익선동 166번지 한옥 골목 초입에 세를 사는 김모(81) 할머니는 6월 말 한옥 쪽방을 비워야했지만 아직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방을 알아보는 건 거동이 가능한 할머니들 이야기다.
김 할머니는 “거제에 사는 딸네 집에 들어가면 좋으련만, 요샌 조선소가 어렵고 딸도 같이 힘들어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동네다. 90살 한옥이 자리한 이곳에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상점을 열기 시작하면서 올해 들어 변화는 더 빨라졌다. 지난 4월 20일 기준 최근 2년간 한옥을 주거용도에서 상업용도로 변경해 새롭게 단장한 상점은 30곳에 달한다. 총면적 3만1121.5㎡에 건축물이 213동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2년 새 전체 건축물의 14%가 변한 셈이다.
수십년 삶을 매일 큰 변화 없이 조용히 이곳 한옥서 살아낸 노인들에게 현재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1931년 8월부터 익선동 166번지 한옥 분양 광고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을 기준으로 이 일대는 85년 간 같은 모습을 유지했다. 갑작스런 변화 앞에 김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 무서워. 나가기 싫다고 했다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해”라고 말한다.
익선동 166-37번지 골목에서 만난 김복순(81) 할머니는 “이제 여기 우리 집이 없어진다”며 “사진 좀 찍어줘, 마지막이니까”라고 말했다. 젖은 목소리였다. 김 할머니는 “1962년에 익선동으로 이사와 아들 넷을 길러내고 1992년도에 떠났다. “여기 우리 아들 친구집, 엄마 친구가 살던 집, 그리고 골목도 다 그대론데 없어진다니까 서럽다”고 혼잣말을 했다.
2014년 10월 서울시가 발표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 의견에 따르면 익선동 일대는 여전히 도시환경정비(재개발)구역으로 묶여있다. 위원회는 “역사도심기본계획관리계획상 특정관리지구 지정이 필요한 지역”이라며 “대책 없이 정비구역이 해제될 경우 무분별한 철거나 개발 허가 요청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지구단위계획이 마련될 때까진 재개발 구역 해제를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신축이나 증축은 불가능한 셈이다. 이에 따라 김 할머니가 1992년까지 살았던 166-37번지엔 상점이 들어와도 내부 인테리어만 바뀔 뿐 집이 없어지진 않는다. 그런데 김 할머니에게 익선동은 곧 없어질 지역이다. 변화 속도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서다.
1997년 논의를 시작한 재개발 추진은 주민 의견 대립으로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미뤄졌다. 그 사이 익선동 한옥집단지구에 대한 역사 가치가 부상하면서 익선동 일대는 재개발 해제 예정구역이 됐다.
20년 가까운 지지부진이 변화를 붙잡아 익선동은 시대를 고스란히 기억했다. 젊은이들은 개발의 부재로 생긴 익선동의 예외적 가치에 반했다. 다만 이제와 시작된 빠른 변화가 할머니들의 90년 가까운 세월을 산산히 분해하는 것이다.
한옥 밀도가 높아 대부분 관광객이 머무는 166-11번지부터 166-76번지 일대 58채 한옥은 9월 1일 현재 7곳에서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중심부의 약 12%가 상점으로 변할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상가로 들어선 곳을 포함하면 37%가 달라졌다. 방벽이 골목을 이루던 익선동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유리벽 골목이 됐다. 9월 공사 예정인 곳만도 5곳이다.
웅크린 시간은 제곱의 가속력으로 거주민을 몰아내고 있다. 쪽방마다 터를 잡은 할머니들은 다만 그 속도가 버겁다. 붓고 아픈 다리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병에 걸려 자꾸만 머물라 말한다.
변화가 빠른 지역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세를 사는 서종환(66) 할아버지는 “이곳은 주인이 사는 집에도 쪽방에다 세를 두는 지역”이라며 “아직은 나가란 말이 없지만 나도 곧 다른 사람들 처럼 나가게 되지 않을까”라고 걱정을 표했다.
익선동 166번지 한옥들은 정세권이 세운 건양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1920년에 정세권이 세운 건양사는 일종의 종합부동산회사로 당시 경성 내 인구 폭증으로 발생한 주택 부족 문제 해소에 주력했다. 건양사는 넓은 대지에 기반한 전통적 한옥보다는 공간을 쪼개 좁은 방을 늘인 형태의 한옥을 공급했다. 작은 마당이 있는 20평 한옥에 주인과 세입자 4명이 터를 잡고 살 수 있는 이유다.
친구들도 사귀고 했는데
나가야지 뭐”
9월 다섯 곳에서 공사가 시작될 예정인 166-24번지 일대 골목에 사는 김정숙(71) 할머니는 7월 24일 원남동 셋방으로 이사했다. “30년정도 이곳에 살면서 친구들도 사귀고 했는데 나가야지 뭐”라며 “이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아 가까운 곳을 얻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빠르게 진입하는 상점으로 인해 익선동 166번지 한옥마을이 지닌 예외적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익선동을 방문한 문사동(28) 씨는 “한옥을 개조한 아기자기한 카페도 좋지만 골목마다 흐르는 특유의 감성이 좋다”며 “대문 앞에 군데군데 앉은 사람들이 마치 과거를 연기하는듯한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익선동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집단지구”라며 “중요한 것은 이토록 오래된 동네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역사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커뮤니티(공동체)에 대한 가치를 놓쳐선 안된다”고 지적한다.
보존은 물리적인 부분에 더해 공동체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이어 “관광객이 상점을 찾는 데는 익선동 한옥마을을 갈 확률이 있고 여기에 곱해 익선동 내에 새롭게 생겨난 상점에 갈 확률이 있는 것이지 상점만 보고 가는 사람은 몇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김경민 교수 인터뷰 영상 / 촬영=배동주 편집=정은비
익선동 166번지 골목에서 만난 관광객 김경은(여·24) 씨는 “이곳엔 제가 살아보진 않았지만 어디선가 본 따뜻한 70년대 분위기가 난다”며 “예쁜 카페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빠른 변화는 세입자를 몰아내고 이곳의 가치마저 추락시키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월을 견딘 한옥집단지구가 시절을 견디지 못할 판이다. 더욱이 익선동 한옥집단지구의 면적이 작아 특정 부분은 주거로 남아있고 나머지는 개발이 되는 일반화를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가치는 지켜져야 한다”
김경민 교수는 “그럼에도 특정 골목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고 그분들은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라며 “돈이 뭐건 간에 이 사람들의 가치는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지난해까지 종로구 환경정비 전략기획수립 용역을 맡았던 한 관계자는 “상점이 들어서는 속도가 빨랐던 것이 동네를 이정도로 뜰 수 있게 만든 것”이라며 “세입자는 더 좋은 거주지를 찾아서 나가면 된다. 이곳은 주거지역이 아닌 상업지구”라고 이야기했다.
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역세권에 접한 도심부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프리미엄을 지급해야 하고 그게 힘들다면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도 분당 인천 등 멀리서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다”며 “나가기 싫어하는 세입자 대부분이 주변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이곳에 쪽방 월세를 사는 노인층 대부분은 20만원 선인 월세를 국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으로 충당한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사람들 얘기다. 그리고 이들에게 교통비는 작은 돈이 아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역사도심과는 “세입자는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공공이 개인의 재산 가치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인데,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 자체로 행정의 실패”라고 지적한다. 2013년 10월 재개발 추진위원회가 해산 신청서를 제출하고 이어 12월 추진위원회 승인을 취소할 당시에 이미 발빠르게 나섰어야 했다는 것이다.
김경민 교수는 “서울시가 행정 수단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나서 사회적 약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이 사람들 이익이 침해받고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며 “주거 기능을 살리는 집주인에겐 임대료 특정 보상이나 건물 실제 가치 제고, 재산세를 인하 등 인센티브를 주고 세입자에겐 임대료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명래 단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한옥이라는 하드웨어에 상점 기능이 들어간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며 “지역 특성을 살리지 않으면 또 다시 관광 가치가 없는 노히어(No Here) 도시를 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