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 166번지로 진입하는 작은 골목길이 있다. 종로3가 4번 출구에서 40m만 걸으면 닿는 익선동 한옥마을 시작점이다. 이 지점에 있던 한옥 두 채가 허물어졌다. 이곳엔 모텔 주차장이 들어섰다. 인근 한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기가 막혀서 서울시 관계자 등 여기저기 다 알아봤다"며 “하나같이 남의 일이다 식이었다. 시 한옥 담당 공무원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말했다. 익선동엔 행정이 없다”고 말했다.
익선동 부동산 관계자 인터뷰 영상 / 촬영=이용우,배동주 편집=정은비
서울시 행정 공백을 틈타 무분별한 개·보수가 익선동 한옥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다. 노후화된 한옥에 카페와 상가들이 규제없이 들어서고 있다. 한옥이 철거되기도 한다.
익선동 166번지는 2004년 5월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돼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도 설립됐다. 14층 높이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2010년 한옥보전방안이 재검토되면서 시·도시 계획위원회가 이 내용을 부결했다. 주변지역 특성상 고층으로 계획변경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또 재개발하려면 주민 75%가 동의해야 하지만 주민동의를 받지 못했다. 익선동은 12년 간 표류했다.
2013년 3월 주민 52%가 동의해 재개발 추진위원회를 해산했다. 이듬해 7월 익선 도시환경정비구역지정 해제 신청이 이뤄진다. 2014년 10월 서울시 도시계획심의위원회는 재개발 구역이 해제되면 난개발이 우려된다며 서울시에 관리방안을 제출하라고 했다.
이에 2015년 6월 시 관계부서는 익선지구단위계획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시 주도로 익선동 지구단위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구단위계획은 익선동에 한옥 특성을 살린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익선동 한옥은 개·보수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카페 등 상업시설이 빠르게 진입하고 있어 지구단위계획이 수립되기 전에 상업화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익선동을 연구하는 한 전문가는 “주거형 한옥을 상업시설로 바꿀 때 담과 골목을 어떻게 할지 등에 관한 기준이 없다”며 “지구단위계획으로 한옥 지구가 정해지면 지침이 까다롭다. 시가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하기 전인 행정공백 기간에 상가 시설들이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시가 제시한 익선동 용역 기한은 올해 12월까지다. 지구단위계획 수립안도 올해 말 발표될 듯하다.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서울시 한옥 밀집지역 현황에 따르면 익선동에는 한옥 119동이 있다. 익선동 전체 건축물 중 55.86%가 한옥이다. 비한옥은 44.14%다. 대지 내 한옥밀도는 30.7%다. 경복궁 서촌(7.8%), 북촌(7.3%), 돈화문로(6.5%)와 비교해 한옥 밀도가 높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익선 한옥촌은 역사적 가치가 크다. 현존하는 한옥집단지구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북촌보다 빠르다. 특히 양반이 살던 한옥과 달리 서민을 위한 근현대적 한옥이 집단적으로 만들어졌고 그 한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익선동은 서울시 지구단위계획 수립과 상관없이 종로세무서를 통해 들어가는 골목부터 카페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다. 최근 익선동이 한옥 명소로 떠오르자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땅주인은 재개발의 꿈을 접고 카페 사업자에게 임대를 내놓는 방법을 새롭게 발견했다. 세입자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했다. 세입자가 떠난 자리에는 한옥을 개·보수한 사업가와 관광객이 차지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카페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한옥을 철거한 것도 막을 수 없다. 지구단위계획이 세워졌다고 한옥 철거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이다. 올해 만들어진 익선포럼에 가면 이 지역 가치를 지키기 위해 주민과 사업자가 모여 토론하고 있다”며 “시에서 모든 걸 다 할 수 없다. 이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반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치우칠 것이 아니다.”
반면 김경민 교수는 “시는 익선동 변화로 이익을 받고, 침해를 받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며 “이곳 세입자 대다수는 3000~4000원 끼니를 얻기 위해 들어온 저소득 서민이다.
카페가 아니라 기존 세입자에게 계속 임대하는 것이 한옥 주인에게 손해가 된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한옥이라는 물리적 보전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구단위계획을 올해 말까지 수립한 후 익선동 한옥 가치를 살리고 이 지역 경관과 풍치를 살리는 쪽으로 관리할 방침이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신축 불가라는 재개발 규제 외에는 뚜렷한 규제가 없다. 한옥보존구역으로 설정해도 카페 등 유입을 막을 수 없다. 한옥보존구역 설정은 지원을 위한 방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빠른 상업화로 익선동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세입자가 떠나는 상황에 대해 시의 대답은 지구단위계획 설명과 비교하면 짧고 명확했다. 시 관계자는 “세입자 문제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익선동 우리가 지킬 것”
익선동엔 익선포럼이 있다. 동네 주민들이 익선동 한옥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민 협의체를 구성했다. 지역 방역 문제와 집단 경관, 각 한옥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 공간을 어떻게 주거와 상업이 공존할 수 있게 할지 등을 논의하고 있다.
익선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김란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익선동이 망가져 가고 있어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며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익선포럼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지난 8월 익선포럼이 ‘뜰안’에서 열렸다 / 사진=이용우, 배동주
익선동 166번지엔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다. 상가를 차린 젊은이도, 집 주인도, 세입자도, 서울시 행정도 그에 맞은 위치와 시선으로 당위를 품었다. 도심환경정비(재개발) 구역이 지정됐다가 구역 지정 취소 예고가 발효됐다가 한옥보존구역 지정으로 이야기가 흐르는 통에 개인들의 이해관계는 혼재됐다. 누구의 말이 맞거나 누구의 말이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소위 뜨는 동네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행정이 빠진 장소에서 주민과 상점 주인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댔다. 90년 세월을 견딘 한옥 마을이 지나치게 빠른 자본의 유입으로 버티지 못한 채 훼손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익선동 지역 공동체 익선포럼은 이렇게 구축됐다.
김선아 익선포럼 대표는 종로구 도시재생 계획 용역을 맡으며 익선동 주민들과 정이 들어 근처에 건축사무소를 차렸다. 김 대표는 “주민 협의체와 전문가 그룹을 만들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정하려 한다”며 “결론이 나지 않을 수 있지만 익선포럼 논의를 종합해 서울시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익선동 내 5군데 상점을 운영하는 박한아 대표는 “한옥 건물을 상가로 단장할 때 무엇은 개·보수해도 되고 한옥 서까래나 기둥은 어떻게 살려야 하는 지에 기준이 없어 개인 취향에 따라 골목이 변하고 있다”라며 “익선포럼은 전체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한아 대표 인터뷰 영상 / 촬영=이용우,배동주 편집=정은비
7년 전 익선동에 전통찻집을 차린 김애란(여·63)씨는 “동네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며 “자신이 찻집 문을 열때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찻집에서 익선포럼이 열린다. 익선동의 역사적 가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동네를 둘러보고 이곳에서 차를 마셨다. 1920년대 익선동 일대에 한옥을 짓고 분양한 정세권씨를 연구하는 이들도 이곳에 모였다.
김 씨가 찻집을 시작한 이후 골목에는 ‘식물(익선동 166-61번지)’이란 카페가 들어왔다. 맞은 편 골목으로 2014년 10월 ‘익동다방(익선동 166-81)’이 문을 열었다. 가게 맥주집 ‘거북이 슈퍼(166-79번지)’가 2015년 4월 장사를 시작했다. 속도는 더 빨라져 ‘경양식1920’, ‘프루스트’, ‘카페 그랑’ 등이 익선동 166-70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들어섰다.
익선포럼 취지와 반대로 재개발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재개발 찬성 주민들은 “이 곳에 건물 올려서 며느리도 집 한 채, 우리 손주도 집 한 채씩 나눠주고 싶었는데 니들이 망쳐놨다”며 카페에 와서 고함을 쳤다.
이순안 할머니 인터뷰 영상 / 촬영=이용우,배동주 편집=정은비
자가 주택을 보유하고 익선동에 거주하는 이순안(여·71)씨는 “벌레에, 쥐에 이곳은 이제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자식들이 오면 자고 가지도 않는다”며 “사람이 살 수도 없는 곳이 돼버렸는데 상점만 들어오면 뭐하냐. 재개발을 재추진했으면 좋겠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는 이유다. 이에 따라 서울시도 목소리 높여 행정 절차를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양병현 서울시 역사도심과 과장은 익선동 일대 도시정책 추진설명회에 나섰다가 주민들로부터 욕만 듣고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지구단위계획의 방향이 한옥 보존으로 갈 것 같다는 발표에 집 주인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시 관계자는 “포럼 구성과 논의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라며 “익선동은 너무나 첨예한 대립이 형성된 공간이니 만큼 익선포럼에서 나온 이야기를 행정에 적극 수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